<아르스앤제니>는 세계 예술의 역사에 위대한 이정표를 만들어온 거장들의 발자취를 따라, 예술의 세계와 위대한 예술가의 비범한 정신 세계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마그리트의 유화를 여러 점 소장하고 있는 뉴욕의 컬렉터 데이비드 로가스는 “마그리트의 때가 왔다”고 말합니다. “그의 이미지는 상징적이며 대중 문화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뉴욕타임즈, Nov. 19, 2024
브뤼셀에서 마그리트와 다른 20세기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문 유통하는 갤러리 디렉터 파올로 베도비는 " 아마도 그가 최고라서 일것입니다. 이제 모든 거물급 컬렉터들이 마그리트의 작품을 원하는 것같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는 마그리트 초현실주의의 매력에 대해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는 매우 현대적(Contemporary)입니다. 당신은 그를 통해 이 세상과 나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힘든 느낌(Being Tough)을 원하지 않죠. 그의 작품은 시적인 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즈, Nov. 19, 2024
마그리트, 초현실주의, 그리고 파이프가 아닌 파이프
뉴욕타임즈 By Deborah Solomon Dec. 1, 2021
translation by arsnjenny
MAGRITTE
그의 삶
르네 마그리트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의 수많은 그림에 등장하는 중절모를 쓴 남자, 어두운 외투를 입은 고독한 방랑자는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때때로 그는 우리를 등지고 있거나 얼굴 앞에 초록색 사과를 공중에 띄운 채로 등장하여 드러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숨기고 있습니다.
마그리트는 위 이미지를 자화상으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림을 그릴 때 양복과 슬리퍼를 신고 보헤미안적인 모험을 피했던 냉정한 모습의 예술가와 물리적으로 닮아 있습니다. 마그리트에 대한 최초의 전기인 알렉스 단체프의 “마그리트: 생애”(Alex Danchev’s “Magritte: A Life,”)에서 알 수 있듯이,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자는 여행을 싫어했고, 파리의 카페에 모여 예술을 꿈과 무의식에 기반한 무법의 영역으로 재창조하겠다는 열망을 큰 소리로 선포하는 프랑스 초현실주의자들을 싫어했습니다. 마그리트는 성인기의 대부분을 브뤼셀 외곽에 거주하며 아내 조제트, 반려견과 함께 조용히 살았습니다. 친구들은 마그리트에게 제대로 된 스튜디오가 없었다고 회상합니다. 그는 식당 한 구석에 이젤을 설치하고 바닥에 물감 얼룩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즉, 그는 예술가는 질서정연하게 생활하고 작품을 위해 야생성(wildness)을 유보해야 한다는 플로베르의 유명한 명언을 구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예술은 놀랍도록 전복적이었으며 일상이 신비에 싸여 있다는 신념에 기초했습니다. 대리석 벽난로에서 툭 튀어나와 흠잡을 데 없는 거실로 들어오는 증기 기관차, 한낮의 밝은 푸른 하늘 아래 어두운 대로에서 빛나는 가로등, “이것은 그림이기 때문에 피우거나 담배를 채울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나무 파이프 그림 등 그는 우리 개인의 기억만큼이나 날카롭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시각적 수수께끼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의 그림 스타일은 의도적으로 일반화 되었습니다. 추상화를 새롭고 급진적인 것으로 높이 평가하던 세기에 마그리트는 개별적인 붓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선명하고 명료한 형상화를 선호했습니다. 예술가는 자신만의 '터치(touch)'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마그리트에게 거창하고 우스워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집스런 견해에 대해 대가를 치뤄야 했습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가 본질적으로 일러스트레이터라고 생각했고, 호안 미로나 알베르토 자코메티와 같은 초현실주의의 실험적이고 즉흥적인 인물들에게 아낌없이 주어졌던 명성을 얻지 못했습니다.
단체프의 전기에 따르면 마그리트는 생의 마지막 10년까지 재정적인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때 알았더라면!
마그리트의 비전은 어린 시절에 겪은 비극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1898년 작은 마을 레시네에서 재단사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고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1912년 겨울 밤, 그와 두 동생이 잠든 사이 어머니는 침실에서 나와 삼브르 강으로 걸어가 익사 자살을 했습니다. 18일이 지나서야 강에서 어머니의 시신이 수습되었습니다.
발견 당시 어머니의 얼굴은 젖은 잠옷으로 가려져 있었고 몸통은 노출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끔찍한 디테일은 이후 마그리트의 작품에서 낭만적 좌절의 아이콘인 '연인들 II'(1928)에서처럼 베일에 싸인 머리가 많이 등장하는 소재로 인용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입술은 닿지 않고 머리는 흰 천으로 뒤덮인 채 키스하는 남녀의 모습을 영화처럼 클로즈업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그리트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사적으로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심리학을 사이비 과학으로 일축했습니다. 단체프는 “어머니가 소용돌이치는 물살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그가 그 자리에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 외에는 이 주제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죽음과 그 이전의 수년간의 우울증이 그의 작품에 만연한 전반적인 불안감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단체프는 확실한 근거를 들어 마그리트의 경력을 설명합니다. 한동안 그는 벽지용 디자인을 그리며 상업 미술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는 명목상으로는 입체파 스타일로 추상화를 그렸습니다. 1923년 조르지오 데 치리코의 걸작 '사랑의 노래'(1914)를 재현한 작품을 보고 깨달음을 얻고 순식간에 사로잡혔습니다. 시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여러 가지 사물(그리스 신들의 희미한 석고 머리, 벽에 못 박힌 고무장갑, 녹색 공)로 구성된 이 작품은 마그리트에게 파편화와 고립이 지배하는 새로운 종류의 표현 회화의 가능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1927년 9월, 마그리트는 파리로 이주하여 프랑스 초현실주의 그룹과 친분을 쌓았습니다. 그들의 영향을 받아 파이프가 아닌 파이프와 같은 이른바 '단어 그림(Word Paintings)'을 비롯한 가장 독창적인 작품들이 탄생했습니다. (파리라는 환경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자들 사이에서 어색한 침입자로 남았습니다.
이 운동의 지도자였던 오만한 시인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은 자신의 컬렉션을 위해 마그리트의 작품 몇 점을 구입했지만, 그를 조롱하며 그의 방대한 저서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단체프(Danchev)는 1929년 브르통의 집에서 열린 작은 파티에서 벌어진 언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브르통은 가톨릭에 대한 경멸을 과시하며 마그리트의 아내에게 왜 십자가를 차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십자가를 떼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녀와 마그리트는 화를 내며 파티를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를 떠났습니다.
“마그리트의 예술적 전기(biography)는 그가 1930년 파리를 떠났을 때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평가 수지 가블릭은 1970년 영어로 출간된 마그리트에 관한 최초의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뉴요커 출신인 가블릭은 1959년부터 8개월 동안 마그리트의 다락방에서 살면서 연구했는데, 이는 그가 신세대 미국인들 사이에서 얼마나 큰 인기를 끌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마그리트가 미국에서 새롭게 주목받게 된 데에는 분명 마르셀 뒤샹의 영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영향력 있는 다다이스트이자 자칭 전직 프랑스 화가인, 당시 그리니치 빌리지에 거주하던 뒤샹은 마그리트의 철학적 성향에 감탄하며 수집가들에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마그리트는 재스퍼 존스( Jasper Johns), 로버트 라우첸버그(Robert Rauschenberg), 앤디 워홀 등 평범한 사물의 파토스(pathos)를 탐구하던 여러 젊은 예술가들에게도 존경을 받았으며, 이들은 모두 60년대 초에 마그리트의 작품을 구입했습니다.
1965년, 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게 된 마그리트는 개막을 위해 뉴욕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는 아내와 반려견인 포메라니안 루루를 동반했습니다. 뉴욕에 머무는 동안 주요 예술가와 비평가들에게 소개를 받았지만 마그리트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고 만난 사람들에게도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는 20년대 프랑스 아방가르드보다 60년대 뉴욕의 아방가르드에 더 큰 애정을 보였습니다.
그는 불과 2년 후인 1967년 췌장암으로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그의 명성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졌고 그의 이미지는 고급 문화와 대중 문화 모두에 경건하게 흡수되었습니다. 그는 언어의 실패에 집착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와, 환각적 환상에 매료된 로큰롤러들에게 동시에 어필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가일 것입니다. 마그리트 자신은 이 소식에 무관심 하겠지만, 폴 메카트니가 비틀즈의 Apple Corps Limited 라는 회사 이름의 출처로 마그리트의 녹색 사과 그림을 인용했다는 사실이 인상적입니다.